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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그 당시 열강들이 했던 것 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만들기로작정합니다. 그래서 옆나라인 조선을 침범하게 되는데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한반도와 우리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을 성공한 일제는 한반도에서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게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수도이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한반도에 수도를 이전하려 했을까요?
1856년에 시작된 2차 아편전쟁은 서양이 동양을 무력으로 이긴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확장 노선을 더욱 더 노골적으로드러내는데 이르게 됩니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에도막부는 쇄국정책을 유지했지만 1854년부터 이어진 미국과 영국, 러시아와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굴욕적인 내용의 통상조약을 차례대로 체결할 수 밖에 없게됩니다.
이와같은 조약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은 들고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에도막부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권력을 잡은 반막부 세력은 이 모든 원인이 나라에 힘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하여 정치와 경제, 문화와 교육등 사회전반에 걸친 모든 것을 뜯어 고치게 됩니다.
이른바, 메이지유신이 시작됩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막강한 힘으로 당시 서구열강들이 했던 것처럼 제국주의 노선을 걷게되는데요.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세력에 독립하여 하나의 아시아를 만들자라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식민지를 정당화 시키려 합니다.그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식민지 확장은 큰무리 없이 진행되는데요. 조선과 대만, 만주와 중국본토 일대, 태평양 일부를 차례차례 복속시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일제는 비밀리에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게 됩니다.
1923년 9월1일, 도쿄 인근 사가미 만을 진원지로 한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로인해 10만여명이 사망하고 피해자만 약340여만명이 집계되게 됩니다. 그리고 전소한 가옥만 39만채가 넘고 도쿄의 60%이상의 파괴를 안겨준 이 지진은 역사에 관동대지진으로 기록됩니다.
일제는 관동대지진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수도이전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1940년대에는 식민지의 크기도 점점 커짐에 다라 수도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일제는 당시 서울 경성제국대학 근처에 있던 흥아연구소를 통해 만주와 한반도, 일본을 포함한 “대동아 공영권”을 실현할 수 있는 수도이전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게 합니다.
수도를 이전 할 몇가지의 선정기준을 마련하여 추진했습니다.
첫번째, 전국토(식민지포함)의 중심적 위치일것
두번째, 지진이나 풍수해같은 천재지변이 적은 지역
세번째, 여름에 너무 덥거나 겨울에 그다지 춥지 않으면서 사계절이 뚜렷할 것
네번째, 땅이 높고 평탄 하면서 주변 경치가 아름다울 것
다섯번째, 식량과 전력, 용수같은 물자가 풍부할것
여섯번째, 교통이 편리하고 기존 도시와의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지역일것
비밀리에 추친되었던 계획이 당시 새로운 수도로 꼽혔던 후보지는 모두 3곳이었습니다. 후보지는 일본 내 오카야마와 후쿠오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도시는 식민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비교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으나 섬으로 이뤄진 일본본토에 있어서 대륙으로의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하여 폐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당시 경성이라 불렸던 서울의 남쪽지역이었는데요.
현재의 위치로 보면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계곡 일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실제 그들은 이 지역으로 가서 지역 측량까지 마쳤으며 설계도면까지 작성한 것이 드러났으며 일제는 이 일대에 일왕이 사는 왕궁과 일본 내 청사와 관공서의 대거 이전까지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본토를 포함하여 조선과 만주, 대만에는 지역별 산업지구를 지정하는 방안도 담겨 있었는데요.
조선 한반도에는 총 23곳의 지역에 건설하려 했습니다. 또한 부산과 신의주, 서울과 두만강과 접해있는 중국 투먼을 포함하여 대전과 현재 경남 사천시 남쪽지역인 삼천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이어서 경부선과 경의선의 철도를 복선화 하고 부산과 일본의 해저터널 건설과 기차 수송방안을 내놓기도 했었습니다. 일제가 계획한 수도이전은 이러한 계획뿐만 아니라 또다른 끔찍한 사실도 담겨져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조선인 200만명을 만주로 강제이주시키고 일본농민 800만명을 그 자리에 다시 채운다는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반도를 일제의 땅으로 만든 후 만주를 포함한 중국전역을 삼키려는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만약 계획이 차차 이루어졌다면 200만명의 인구가 아닌 당시 2000만명 이었던 한민족이 영원한 고향을 강제로 떠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광경을 겪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야심찬 계획은 1945년 미국이 일본에게 선물한 원자폭탄 2방에 의해 모두 폐기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과거 우리조상은 일본을 하찮고 미개한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문물을 알려주었으며 때로는 그들에게 공물을 받는 등 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놓친 조선은 결국 미개한 일본에 의해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힘이 없으면 당할 수 밖에 없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 다시는 이와같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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